1628년 1월 3일의 죽산에서 발생한 어느 고변서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가있어 정국(庭鞫)에서 형문을 받았다. 그러나 혐의점이 없어서 풀려났다.<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6년 무진(1628) 1월 3일(을축) 맑음 10번째 기사, 정국에서 죄인 이계선 등을 나수하였다>
1628년 8월 28일 전적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도 이름이 잘못 등재되었다.<승정원일기 > 인조 인조 6년 무진(1628) 8월 28일(병진) 맑음 2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박경원(朴慶元)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이급(李級)을 어천도 찰방(漁川道察訪)으로, 이성원(李性源)을 예조 정랑으로, 한인급(韓仁及)을 장악원 정으로, 배명순(裵命純)을 공조 좌랑으로, 이경항(李景恒)을 전적으로, 허전(許銓)을 평안 우후(平安虞侯)로 삼았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무진(1628) 8월 28일(병진) 맑음 2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1628년 12월 25일에는 형조좌랑으로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9권, 조 6년 12월 25일 신해 3번째기사 1628년 명 천계(天啓) 8년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12월 25일 신해 3번째기사 1628년 명 천계(天啓) 8년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우승지 이경용(李景容)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당시 해서(海西) 지방이 탕진되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경용은 한 도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나간 것이다. 조희맹(趙希孟)을 안협 현감(安峽縣監)으로 삼았는데, 희맹은 고변한 자이다. 이경항(李慶恒)을 형조 좌랑으로 삼았다. 경항은 처음에 임숙영(任叔英)에게서 배웠으나 뒤에 숙영을 배반하고 이이첨(李爾瞻)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반정 초기에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는데 그 친족(親族)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관학 유생들을 협박, 그를 풀어 주도록 하여 드디어 과거에 오르니, 사론(士論)이 분하게 여겼다. 유백증(兪伯曾)을 조사 위장(曹司衛將)으로 삼았다. 백증은 새로 받았던 자급(資級)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구 자급으로 강등되어 그대로 한산직에 있었다. 백증은 순박하여 거짓이 없고 일을 할 때는 몸을 사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언론이 고준(高峻)하고 온화함이 적어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공격하므로 군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조경(趙絅)을 교리로 삼았다.
1628년 12월 25일에는 형조좌랑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에도 승정원일기 기사에는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무진(1628) 12월 25일(신해) 02번째기사, 도목 정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듬해 2월 26일자 형조의 대리근무자 기록에는 景이 아닌 慶으로 되어 있어 그가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목 정사(都目政事)가 있었다. 특지(特旨)로 심집(沈諿)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허완(許完)을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최수(崔琇)를 지사로, 이희민(李希閔)을 동지중추부사로, 유여각(柳汝恪)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정지우(鄭之羽)를 호조 정랑으로, 이위국(李緯國)을 형조 정랑으로, 조경(趙絅)을 홍문관 교리로, 이경항(李景恒)을 형조 좌랑으로, 이사상(李士祥)을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6년 무진 > 12월 25일 > 최종정보
인조 6년 무진(1628) 12월 25일(신해) 비 06-12-25[02] 도목 정사가 있었다>
1629년 2월 26일에는 형조정랑으로 재직 중, 지방에 파견된 색정랑(色正郞) 조희진(趙希進)을 대신하여 대방(代房) 근무를 섰다.<국역 승정원일기 > 인조 7년 기사(1629) 2월 26일(임자) 아침에 눈 오고 해질녘에 맑음 17번째 기사, 포도군관 이종인 등에 대한 공사가 늦어진 이유를 형조에 문계한 결과를 보고하는 유백증의 계>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7년 기사 > 2월 26일 > 최종정보
인조 7년 기사(1629) 2월 26일(임자) 아침에 눈 오고 해질녘에 맑음
07-02-26[17] 포도군관 이종인 등에 대한 공사가 늦어진 이유를 형조에 문계한 결과를 보고하는 유백증의 계
유백증이 아뢰기를,
“형조가 올린 포도군관 이종인(李宗仁) 등에 대한 공사와 관련하여, ‘이 공사를 조율하도록 19일에 판하하였는데, 어찌하여 여러 날 지체하는지 문계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본조에 물어보니, ‘색정랑(色正郞) 조희진(趙希進)이 지방에서 올라와 21일 숙배하고 당일에 좌기(坐起)하였지만 신입 관원이라 전후의 문서를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24일에 좌기하여 비로소 조율하였습니다. 조희진이 아직 들어오기 전에는 이경항(李慶恒)이 대방(代房)이 되었으나 21일 전에는 좌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제때 조율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1629년 4월 10일 함경도 도사로 재직 중 통정대부에 임명되었다.
<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7년 기사(1629) 4월 10일(을미) 맑음 2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경기 도사(京畿都事) 원진명(元振溟), 함경 도사(咸鏡都事) 이경항(李慶恒), 평양 서윤(平壤庶尹) 허직(許稷), 형조 정랑 변득일(邊得一), 좌랑 이유(李愈), 남원 부사(南原府使) 송상인(宋象仁)에게 이번에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다.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최진명(崔振溟), 안성 □□(安城□□)에 김수렴(金守廉), 의성 □□(義城□□)에 허수(許洙), 여산 부산(礪山府使)에 윤형(尹泂),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배명순(裵命純), 서산 □□(瑞山□□)에 조희진(趙希進), 재령 군수(載寧郡守)에 이창업(李昌業)을 차하하였다.<국역 승정원일기 > 인조 7년 기사(1629) 4월 10일(을미) 맑음 2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로 통정대부에서 개차되었다. 그가 왜 통정대부 승진이 개차되었는지 이유는 나타나있지 않다.
1630년(인조 8년) 10월 14일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어느 부서인지 삭제되었다.<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8년 경오(1630) 10월 14일(기미) 맑음 13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그러나 11월의 기사에 그의 부서가 공조인 것이 나타난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8년 경오 > 10월 14일 > 최종정보
인조 8년 경오(1630) 10월 14일(기미) 맑음
08-10-14[13]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판서 정경세(鄭經世)는 나왔고, 참판 김수현(金壽賢)은 병이고, 참의 이명한(李明漢)은 나왔고, 도승지 강석기(姜碩期)는 나왔다. 병비에, 판서 이홍주(李弘冑)는 나왔고, 참판 홍방(洪霶)은 식가이고, 참의 김시국(金蓍國)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참지 이목(李楘)은 나왔고, 우부승지 권확(權鑊)은 나왔다.
이비가 - 원문 빠짐 - 이경항(李慶恒)을 □□ 정랑으로, 심연(沈演)을 지평으로, 이경의(李景義)를 헌납으로, 고부행(高傅行)을 성균관 직강으로, 조계원(趙啓遠)을 공조 좌랑으로 삼았다. - 원문 빠짐 -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이면(李沔)을 차하하였다. 박추(朴簉)를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목장흠(睦長欽)을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조즙(趙濈)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준(□□濬)을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진상홍(秦尙弘)을 평해 군수(平海郡守)로, 정원석(鄭元奭)을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변복일(邊復一)을 평안도 도사로, 임효□(任孝□)를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이태남(李泰男)을 인제 현감(麟蹄縣監)으로 삼았다.
병비가 신경진(申景珍)을 겸 내금위장(兼內禁衛將)으로, 홍립(洪雴)을 첨지중추부사로 삼았다. 별아(別兒)로는 윤형언(尹衡彦)을 부사직으로, 조경진(趙景禛)을 부사직으로, 이행진(李行進)을 부사과로 삼았다. 외직(外職)으로는 원성남(元聖男)을 □□진관 갈파지병마첨절제사(□□鎭管坡知兵馬僉節制使)로, 오□□(吳□□)를 다대포진 수군첨절제사(多大浦鎭水軍僉節制使)로, □효성(□孝誠)을 부산진관 감포□□만호(釜山鎭管甘浦□□萬戶)로, 김일(金逸)을 부산진 □포수군만호(釜山鎭□浦水軍萬戶)로 삼았다.
1631년 윤 11월 15일의 기사에 그가 공조정랑으로 재직중인 기사가 나타난다.<승정원일기 >
인조 9년 신미(1631) 윤11월 15일(갑인) 맑음 3번째기사, 정사가 있었다>
1631년 12월 27일 인조가 경연에서 《서전》 주서(周書)를 강할 때 기주관으로, 참찬관 목서흠(睦敍欽), 시독관 유성증(兪省曾), 검토관 구봉서(具鳳瑞), 이경항(李慶恒), 기사관 김숭조(金崇祖)ㆍ이시해(李時楷)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때 경연 소대의 주제는 ‘고명(顧命)’에서 ‘기치형조의재(其致刑措宜哉)’까지였다.<승정원일기인조 9년 신미(1631) 12월 27일(을미) 맑음 02번째기사, 소대할 때 참찬관 목서흠 등이 입시하여 《서전》을 진강하였다>
1632년 3월 6일 오시에 인조가 자정전(資政殿)에서 경연 주강을 행할 때 기주관으로, 지사(知事) 이귀(李貴), 특진관 이성구(李聖求), 참찬관 목서흠(睦敍欽), 시강관 조위한(趙緯韓), 시독관 나만갑(羅萬甲), 가주서 이시만, 기사관 심지한(沈之漢) 등과 함께 입시하였다. 이때 인조는 전에 배웠다는 《서전》 경명(冏命)의 전 부분을 진강(進講)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3월 6일(계묘) 19번째 기사, 자정전에서 주강을 행할 때 지사 이귀 등이 입시하여 《서경》을 진강한 뒤 인경궁에 이안하는 절목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632년 4월 8일에는 목서흠의 보고에 의하면 공조정랑으로 정원대원군의 추숭도감(追崇都監) 낭청으로 활동했다. 추숭도감의 어떤 직역인지는 확실하지 않다.<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0년 임신 > 4월 8일 > 최종정보
인조 10년 임신(1632) 4월 8일(을해) 흐리고 비 옴
10-04-08[09] 승화전 당가 북쪽에 신주를 봉안하고 남쪽에 소탑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봉안하는 곳으로 삼을 것 등을 청하는 공조의 계> 뒷날의 5월 8일자 승정원일기 기사에는 감조관(監造官)으로 나온다.
5월 8일 추숭도감관원들을 포상할 때 감조관(監造官) 이었던 그는 6품으로 오른자는 천전하고 6품이 되지 못한 자는 승서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6품 이상이었다.<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0년 임신 > 5월 8일 > 최종정보
인조 10년 임신(1632) 5월 8일(을사) 맑음
10-05-08[04] 추숭도감의 도제조인 우의정 김상용 등에게 시상하였다>
이때 승정원에서 그가 중복으로 상을 받았다고 보고한다. “이번의 상격(賞格) 가운데 중첩하여 상을 받는 자 및 누락된 자의 유무에 대해 승지가 살펴보도록 전교하셨습니다. 공조 정랑 이경항(李慶恒)은, 옥책을 받든 것에 대한 상격은 반숙마(半熟馬) 1필이고, 보안(寶案)을 감조(監造)한 것에 대한 상격은 승서하는 것입니다. 전 제조 박동선(朴東善), 전 낭청 이상질(李尙質)은 서계 안에는 있으나 상격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5월 10일(정미) 02번째기사, 중첩하여 상을 받는 자와 누락된 자를 살펴서 보고하는 승정원의 계>
그러자 인조는 “이경항은 중첩하여 상을 주지 말라. 이상질은 궁자(弓子) 1장(張)을 사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5월 10일(정미) 흐림 02번째 기사, 중첩하여 상을 받는 자와 누락된 자를 살펴서 보고하는 승정원의 계>
처사촌 오빠인 이서의 도움으로 유적삭제와 추방을 모면하였지만, 그는 대북 당원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었고, 인조는 이 일로 이경항을 좋지 않게 본 것 같다. 이경항이 대북의 당원으로 가담했다는 근거는 없고, 1617년 10월부터 1618년 10월까지 인목대비 폐비론을 주장하거나 동조하는 관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1636년 7월 18일 통훈대부 행 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18일(경신) 18번째 기사, 이비가 김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636년 8월 7일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임명되고<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8월 7일(무인) 22번째 기사, 김상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637년 6월 그는 금교찰방(金郊察訪) 으로 부임하였다. 6월 이전의 어느 시점인지는 정확하지 않다.<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9일(병오) 06번째 기사, 본도의 감사 김세렴과 상피 혐의가 있는 금교 찰방 이경항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그러나 당시 황해도의 관찰사는 동명 김세렴(金世濂)이었다. 그는 김세렴이 자신의 둘째 아들 이가우의 장인이므로 상피를 신청하고 이것은 6월 9일에 이조를 거쳐서 임금에게 전달된다.<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9일(병오) 06번째 기사, 본도의 감사 김세렴과 상피 혐의가 있는 금교 찰방 이경항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6월 9일 이전에 금교 찰방(金郊察訪) 이경항(李慶恒)의 정장 내에, 본도의 감사 김세렴(金世濂)과 혼인 관계이므로 법적으로 상피해야 마땅하니 규례대로 처치해 달라고 올린 상소가 인조에게 전달되어 허용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9일(병오) 06번째 기사, 본도의 감사 김세렴과 상피 혐의가 있는 금교 찰방 이경항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그는 곧 예안현감으로 내려갔다.
1637년(인조 15년) 6월 5일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가<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5일(임인) 02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그해 6월 9일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부임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9일(병오) 05번째기사, 이비가 김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640년(인조 18년) 12월 11일 다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승정원일기 인조 18년 경진(1640) 12월 11일(정사) 03번째 기사, 정사가 있었다>
1641년(인조 19년) 5월 9일 비변사 사록에 임명되었다가 즉시 출사하지 않다가 출사한 지 2, 3일 만에 병을 핑계하고 정순(呈旬)하였다. 이 일로 김상의 탄핵을 받고 임금이 체직을 윤허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19년 신사(1641) 5월 9일(계미) 03번째 기사, 신병을 핑계하고 정순한 사록 이경항을 파출하고 후임을 가려서 차출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 대신의 계>
이 뒤로는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어디에도 그에 대한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647년에도 겸춘추에 임명된 이경항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이경환(李慶桓)으로서 그가 아니다. 만약 인조가 이경항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착각하여 내렸을 가능성도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1641년 5월 8일 비변사에서 계를 올려 임무를 회피한 그를 파면시켜달라는 계를 올렸다.<비변사등록>
기사제목 : 임무를 規避한 司祿 李慶恒을 파면하고 그 대임을 잘 선발하길 청하는 備邊司 郎廳의 啓
연월일: 인조 19년 1641년 05월08일(음)
備邊司郞廳, 以大臣意啓曰, 司錄, 卽政府僚屬, 曾在祖宗朝, 爲選擇之地, 申用漑, 以一代重望宰相之材, 亦經此任, 至今傳言, 中世以後, 用人寢輕, 冗雜苟充, 殊非設官之本意, 司錄李慶恒, 視爲汚官, 不卽出任出仕兩三日, 稱病呈旬, 相臣以爲不可, 則旋卽呈辭下鄕, 顯有規避之跡, 新進此等之習, 不可不懲請罷黜, 其代勿論曾經近侍槐院分館極擇差出, 以存舊規以矯近弊何如, 答曰, 依啓<비변사등록 6책 인조 19년 1641년 05월08일자(음), 임무를 規避한 司祿 李慶恒을 파면하고 그 대임을 잘 선발하길 청하는 備邊司 郎廳의 啓>。
비변사 낭청이 대신의 뜻으로 아뢰기를
"사록(司錄)은 정부의 관료로서 일찍이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신중히 선발하였던 자리입니다. 신용개(申用漑)는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받는 재상의 재능을 가진 자로서 역시 이 사록을 역임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중세 이후로 인재를 등용함이 침체되어 용렬한 자를 구차히 채우고 있으니 사록을 설치한 본 뜻에 자못 어긋난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사록 이경항(李慶恒)은 비천한 관직이라고 여겨 즉시 나와 일을 보지 않았고 출사(出仕)한 지 2·3일 만에 병을 핑계로 정순(呈旬)註 001하였으며 소속 상관이 불가하다고 하자 즉시 정사(呈辭)한 다음 고향으로 내려 갔으니 그의 규피(規避)한 흔적이 현저합니다. 신진(新進)들의 이러한 습성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경항을 파면하고 그 대임으로 근시(近侍)를 역임한 자를 따지지 말고 괴원분관(槐院分館)에서 잘 선발하여 옛 법을 보존하고 큰일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국역비변사등록 6책 > 인조 19년 5월 > 임무를 規避한 司祿 李慶恒을 파면하고 그 대임을 잘 선발하길 청하는 備邊司 郎廳의 啓(1641-05-08(음))>
결국 그는 정순을 청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하여 비변사낭청의 탄핵을 받고 면직된다.
어느 시점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는 이후 사복시첨정 겸 춘추관기주관에 다시 임명되었다.<사마방목, 이서우 입격 기록> 그의 사후 넷째 아들 송곡 이서우(李瑞雨)의 사마방목이나 국조방목 란에 부친품계와 전력이 통훈대부 전행사복시첨정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의 최종관직이 되었다.
1642년(인조 20) 5월 4일 어머니 하동정씨가 사망하였다. 하동정씨의 사망 원인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광주 대장리의 선영에 모신 어머니의 3년상 시묘살이를 하던 중 병을 얻는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몸이 수척해져서 임종에 이르게 되었다. 임종 직전에 몸이 무척 수척해졌다는 것을 보아 영양실조와 과로 등으로 인한 합병증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당뇨였을 가능성, 그밖의 다른 질병을 앓더라도 몸이 수척해질 수 있다. 묘지는 산에 안장하는 바, 세균이나 진드기, 혹은 모기에 물렸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1643년 10월 17일에 졸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3세 아직 한참의 나이에 웅지를 펼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미수 허목의 <첨정 이공 묘갈명>에 의하면 임종 시 90세된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어서, 고종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여 차마 말을 다하지 못하였다 한다.<국조인물고 이경항묘갈명, 미수기언 첨정 이공 묘갈명>
이후 그의 집안에는 연달아 불행이 닥쳤다. 아버지 이길남이 1644년에 사망하고, 둘째 아들 이가우는 1646년에 사망한 것이다. 1561년 8월 22일에 태어난 아버지 이길남은 그가 죽고 그 이듬해 1644년 2월 22일에 사망하였다. 1810년 이후의 족보 기록상에는 1561년으로 되어 있으나, 미수 허목이 90세가 다된 아버지라고 한 것을 볼 때, 이길남의 실제 생년은 1557년생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형 이명남(李命男)은 1556년 5월 4일 생이고, 이는 사마방목과 국조문과방목에도 나타난다. 이길남의 출생 년도는 1557년 8월 22일로도 추정되는 것이다.
둘째 아들 이가우는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부친의 삼년상을 하던 중 1646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미수 허목, 호주 채유후 등은 이를 두고 불행이라 하였다. 그는 선산김씨 김세렴의 딸과 결혼하여 당시 나이 7세인 딸이 1명 있었다.